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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권과 자기결정권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작성자
성산생명윤리연구소
작성일
2020-12-29 12:53
조회
666
한국 교회는 지금 (목회와 신학 12월호) 이슈와 진단





생명권과 자기결정권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성산생명윤리연구소 이명진 소장     글 송지훈 기자 · 사진 정화영 기자













2019년 4월 헌법재판소에 의해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이후 낙태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시대적 가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은 생명권과 자기결정권을 저울질하기 시작했고, 줄지 않는 신생아 유기 사건에 비혼모 이슈까지, 크리스천들은 여러 사안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헷갈리기만 한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생명 윤리를 연구하는 성산생명윤리연구소의 이명진 소장은 생명은 포기할 수 없는 절대 진리의 영역이라며 이를 지키기 위해 기독교인이 교회 내외에서 활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12월 1일 금천구에 있는 명이비인후과에서 이명진 소장을 만났다.











어떠한 계기로 성산생명윤리연구소 활동을 하게 되었는가?

2008년 광우병 사태가 벌어졌을 때 한 의사가 흰 가운을 입고 나와서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다 죽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의사도 의견을 낼 순 있지만 통계와 근거 없이 확률이 희박한 이야기를 비과학적으로 한다는 것이 좋지 않게 보였다. 의사로서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선동적이고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비윤리적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를 표현할 능력이 안 되었기에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생명을 대하는 의사를 직업으로 삼고 있기에 생명윤리와 의료윤리에 관심이 많았다. 더군다나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성경적 세계관에 기초해 생명윤리를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찾았고, 성산생명윤리연구소에 오게 되었다. 연구소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지속적으로 공부하다보니 작년부터 소장까지 맡게 되었다.

성산생명윤리연구소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전문적으로 생명윤리를 연구하고 사회의 각 분야에 참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사람의 탄생부터 죽음,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윤리적 문제를 다룬다. 성경에 명확하게 나오는 부분도 있고 모호하게 언급되는 부분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성경에 기초해서 올바르게 분별할 수 있도록 성도와 사회에 기준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잘못된 정책이나 법이 나왔을 때 목소리를 내는 일도 한다. 기독교 교리에 맞지 않거나 자연법의 이치에 맞지 않는 정책이 나오면 성명서도 내곤 한다.

많은 사람이 옳다고 말한다고 꼭 옳은 것은 아니다. 말씀이 절대 진리인 것처럼 생명윤리도 타협의 여지가 없는 절대 진리다. 그래서 외롭거나 힘든 상황도 많다. 특히나 지금처럼 크리스천까지도 성경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시대에는 더 그렇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지자적 사명을 주셨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는 성경적 가치관에 입각해서 활동하는 단체가 많지 않다. 생명윤리를 다루는 단체가 조금씩 생겨나는데 학술적으로 탄탄하게 갖추어진 곳은 제한적이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안락사, 낙태, 줄기세포 등 생명과 관련한 문제가 계속해서 제기된다. 갈수록 생명윤리는 중요해질 것이다.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만큼 위험성도 따른다. 항상 성경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창세기의 인간은 건축술이 발달하자 바벨탑을 쌓았다. 1층, 2층 쌓아 올리다 교만이 생기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러면 틀림없이 문제가 생긴다. 빠른 발전 속에서도 우리는 진리를 지켜야 한다.

과학이 발달하면 윤리적 문제가 따라 발생하기 마련이다. 윤리적 기준이 과학의 발달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생기는 지체 현상이다. 그래서 기술이 발달하면 분석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크리스천 중 과학자, 법률가, 윤리학자들이 성경적 관점으로 빠르게 분석하고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교회에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래야 목회자나 성도가 혼란을 겪지 않는다. 우리 단체는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난 빌립 집사의 역할을 하려고 한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성경을 열심히 보았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말씀을 자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 알지 못했는데 빌립 집사가 가르쳐 주니 깨달았고 신앙과 삶을 접촉시키게 된다.

미혼모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과 이에 대한 교회의 접근법은 어떠해야 하는가?

두 가지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첫째는 근본적으로 미혼모의 발생을 막는 일이고, 둘째는 발생한 미혼모를 돌보는 일이다.

미혼모 발생을 막기 위해서는 성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성경적 성교육이 중요하다. 첫 단계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올바른 성에 대한 개념을 가질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성은 생명과 똑같다. 성이 있으면 생명이 탄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성은 인격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성은 한 남자와 여자가 이룬 가정 안에서만 허락된 제한된 행위다. 혼전 성관계는 하나님이 금지하신 것이다. 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에서 이와 같은 가르침을 이미 말하지만 세상이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전 세계적으로 미혼모가 나타나는 이유는 성경과 다른 가치관이 이야기되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교회와 성도는 성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해야 한다. 세상의 것을 이겨내야 한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한다. “교회가 낙태를 허락하지 않았다면, 사회가 감히 그것을 허용하라고 주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사실은 교회의 잘못된 대처가 문제다. 신학의 문제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신학교가 바로 서고 올바른 교리가 목회자들에게 무장되어 그들이 올바른 설교를 할 때, 그 설교를 듣고 모든 성도가 올바른 신앙인으로 생활할 수 있다. 어떤 하나가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학이다. 신학이 타락할 때 우리 신앙이 타락하고 결국 생활이 무너진다. 낙태하는 이들이 신앙이 있든 없든, 결국 그것은 교회의 책임이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언덕 위에서 빛으로 환히 비추었다면 감히 부끄러워서 세상이 심각하게 타락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미 낳은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용기를 가지고 출산한 아이와 산모는 당연히 보호해 주어야 한다. 어떤 생명이든 귀하기 때문이다. 그 영혼이 회개할 수 있도록,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려 주어서 올바른 길로 회복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예수님은 그녀를 향해 질책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게 해 주셨다. 우리에게도 회복의 사역이 필요하다. 물론 손을 내민다고 금세 돌아오지 않는다. 오래 기다려 주고 보호해 주고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그런 사역을 우리가 준비해야 한다. 이들을 위해서도 올바른 신학과 헌신, 그리고 물질적 지원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왜 이렇게 낙태가 만연해졌을까?

새롭게 떠오르는 행복의 가치, 그리고 근현대사의 사회적 분위기가 결합된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아이의 생명권과 행복추구권이 충돌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사람을 죽여서 행복을 찾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한 생명을 위해 교회가 목소리를 내고, 힘을 모아야 한다. 우리는 먼저 사랑받은 자들, 거둠을 받은 자들이다. 그 사랑을 전하는 방법은 생명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다.

그동안 교회가 참 무지했다. 우리나라의 1970년대 출산율은 4.5명 정도 되었다. 많이 낳다 보니 경제적 발전에 문제가 되어 정부는 강력한 산아제한정책을 세웠다. 이번에 문제가 된 모자보건법도 1973년에 만들어졌다. 그때 출산율이 4.1명 정도였다. 그러다 10년 만에 2.5명으로 감소한다. 당시 아이를 적게 낳자는 여러 구호가 있었다. ‘둘만 낳아 잘 키우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여럿 낳아 거지되고 한 명 낳아 부자된다.’ 나라에서 열심히 홍보했고 국민들은 세뇌되었다.

사회적 분위기는 낙태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죄의식 없이 흔하게 행했다. 문제는 그 시절 교회에서도 엄청난 낙태가 행해진 것이다. 모르고 했지만 마음에 불편함이 있었기에 목회자들도 이에 대한 설교를 꺼렸다. 심지어 산부인과 의사 중에서 신실한 크리스천임에도 낙태가 죄라는 설교를 듣지 못하고, 낙태한 돈으로 헌금도 하고 선교도 다니신 분들이 많다. 비극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 교회에서 버젓이 자행되었다.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 아프시겠는가? 출산으로 인한 인간의 고통만 이야기하지 하나님이 느끼실 고통은 생각하지 않는다. 소금의 맛은 없고 관용만 있다. 신학의 문제가 거기서 발생한다. 하나님 사랑 없이 이웃을 사랑하면 왜곡된 사랑으로 간다. 자기를 사랑하는 욕망으로 바뀐다. 권리만 있지 책임은 없다. 죄를 짓지만 모두가 피해자처럼 스스로 여기게 된다. 성경적 가치관을 다시 세워야 한다.

헌재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 이후 정부가 개정안을 마련했다. 새로운 정책과 법에 대한 성산생명윤리연구소의 의견은 무엇인가?

모든 법과 규칙에는 기준과 원칙이 있어야 한다. 원리를 알면 대응이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 연구소도 원칙을 제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근거해 내세운 3대 원칙은 이렇다.

첫째, 모든 생명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태아에게 신체적 결함이 있을 수도 있고, 부모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 모든 상황과 상관없이 모든 생명은 존중받아야 한다. 둘째는 상업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낙태가 돈벌이가 되면 안 된다. 현재 낙태 비용이 70-100만원 정도이며 아이의 주수가 늘어나면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고 한다. 어떻게 생명을 죽이면서 돈을 벌 수 있는가? 상업화는 절대 안 된다. 셋째는 의료인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의료인들은 생명을 존귀하게 생각한다. 낙태를 찬성하지 않는 의료인이 많을 것이다. 크리스천 의사라면 물론 낙태를 반대할 것이다. 그들에게 낙태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그것은 폭력이다. 전문가적 양심이나 신앙적 신념이 있는 사람에게 낙태 수술을 강요해선 안 된다.

이러한 원칙 아래 여러 정책이 있을 수 있다. 연구소가 추진하는 정책은 ‘비밀출산제’다. 현재 입양특례법에서는 산모의 출생신고를 의무화했다. 많은 미혼모들이 생명을 죽일 수 없어서 10개월 동안 뱃속에서 아이를 지켰다. 아이를 낳은 후에는 직접 키우거나 입양을 보낼 수 있다. 현행 입양특례법에 따르면 출생신고 시 산모의 이름을 적어야 한다. 아이를 낳았으나 직접 키우지는 못하는 경우라도 산모의 이름이 영원히 따라다니니 낙태하거나 홀로 아이를 낳아 유기한다. 실제로 2012년 출생신고를 의무화한 개정 입양특례법이 시행된 후 영아 유기가 급격히 증가하고 입양률은 도리어 감소했다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미혼모의 수도 많이 줄었는데, 실제로 준 게 아니라 낙태하거나 유기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비극적인 뉴스가 끊임없이 나오는 거다. 비밀출산이 법제화 되면 아이를 낳을 적에 굳이 엄마의 이름을 적지 않아도 의사가 출생신고를 해줄 수 있다. 미국에서는 아이가 태어난 것을 의사가 확인했기 때문에 의사 주관 하에 출생 신고를 할 수 있다. 본인이 키울 수도 있지만 입양의 기회도 있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입양은 상당히 성경적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 양자 삼아 주셨다. 생명을 살리고 지킬 수 있는 한 방법이다.

최근에는 비혼모에 대한 이슈도 있다.

나는 비혼모가 가장 타락한 현상이라고 본다. 성경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정을 이루게 명시하셨다. 하나님은 가정이라는 질서를 만들어 두셨다. 가정은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다. 가정이 무너지면 교회가 무너지게 된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지키는 것은 신성한 일이다. 사탄은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제일 먼저 가정을 공격한다. 가장 쉽게 공격할 수 있는 것이 성적인 문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어야 하고, 그 둘 사이의 성적 윤리를 지키는 신성함, 순결함, 성결함이 있어야 한다. 그 가운데 생명이 태어나야 한다. 그 울타리가 무너지면 아이들이 보호를 받지 못한다. 외로움과 고독 가운데 자란 아이들에게는 사회를 향한 분노만 남게 된다. 결국 범죄자가 되어 그 분노를 세상을 향해 표출한다. 아름다운 사회, 바람직한 사회가 이루어질 수 없다. 가정이 무너지면 교회가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진다는 것을 서구 사회가 이미 경험했다.

“내가 내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데, 왜?”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는 반려견이 아니다. 자신의 소유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육과 번성의 사명은 질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질서를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셨다. 문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지, 담을 넘어 오면 다 도적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평안하고 안전하기 때문이다. 평안하고 안전한 길이 있는데, 굳이 담을 넘어서 딴 짓을 할 이유가 없다.

실제로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비혼 가정에서 선택권에 의해 태어난 아이가 얼마나 책임 있는 양육을 받겠는가? 그 아이의 복지에 대해서 아무도 책임지지 못한다. 실제로 아이 한 명 기르는 것은 몇 사람의 엄청난 에너지가 소요되는 일이다. 내가 가지고 싶다고 가지고, 버리고 싶다고 버리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버려지는 반려견도 상당하다. 아이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버리는 일이 없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는가.

게다가 공여받은 정자에 대한 안정성도 보증할 수 없다. 현행 체제에서는 정자에 성병이 있는지 정도만 검사한다. 얼마 전 미국에서 지능이 떨어지고 정신 병력까지 있는 남성이 자신이 수재라고 거짓말하고 정자를 제공해 이미 스무 명이 넘는 여성이 아이를 낳은 사건이 발생했다. 나중에 남성이 자신의 거짓을 고백했지만, 이미 태어난 아이와 사기당한 어머니들의 삶은 누가 책임지는가? 그러한 범죄로 이어질 수 있고 안전하지가 않다.

출산은 반드시 가정 안에서, 그리고 질서를 지키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비혼 출산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기결정권’이라고 말하지만 생명의 가치와 자기 결정의 가치는 비교할 수 없다. 최근 자기결정권과 생명권이 충돌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자기결정은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것인데 사람이 살다 보면 행복할 수도, 덜 행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명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다. 마찬가지다.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에 불과하다. 자기 행복추구권으로 생명을 함부로 취득하거나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일들에 대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교회 내에서 할 일과 교회 밖에서 할 일,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교회에서 할 일의 첫 번째는 낙태가 죄라는 것을 분명히 선포하는 일이다. 두 번째는 성도만큼은 절대로 낙태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법이 어떻게 만들어지더라도 우리가 하지 않으면 된다. 우리는 세상 법을 넘어 생명과 양심의 법을 따라야 한다. 낙태 안 한다고 벌주는 사람은 없다. 당당하게 우리의 가치를 가지고 낙태하지 않아야 한다. 세 번째로 회복이 있어야 한다. 어두운 근현대사의 그늘 속에서 낙태한 성도 가정이 매우 많기에 낙태는 교회에서 언급하기 힘든 주제다. 대부분 모르고 죄를 지었다. 그래서 낙태라는 무거운 죄책의 멍에를 깨뜨려 주어야 한다. 그래야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고 세상을 이길 수 있다. 회복 사역이 필요하다.

교회 밖에서 해야 할 일의 첫 번째는 복음 전도다.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을 알게 되면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죄인인 자신이 받은 사랑을 알게 되어 자존감도 회복된다. 즉 모든 회복은 복음에서 이루어지기에 전도가 필요하다. 두 번째는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는 정책을 개발하고 사회적 시스템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것에는 입법 활동도 있을 것이고, 미혼모를 돕는 일도 포함될 것이다.

이 두 가지 방향 모두가 필요하다. 큰 조망 아래서 실행하지 않고 한쪽에만 치우친다면 종국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수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기조와 균형 아래에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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